이처럼 사소한 것들 - 아일랜드 작은 마을에서 피어난 용기의 기록
이 작은 책은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이 2021년에 발표한 중편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소개하려는 글입니다. 두툼한 장편 대신 서늘한 겨울 공기처럼 맑고 간결한 문장으로, 크리스마스를 앞둔 1985년 아일랜드의 작은 항구 마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예요. 키건은 이미 단편집 『안티고네의 겨울』 등으로 “숨을 삼키게 만드는 단문”을 선보였고, 이번 작품에서도 짧은 분량 안에 인간의 존엄과 연대에 관한 질문을 촘촘히 심어 놓았습니다.
침묵이 스며든 항구의 공기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무대는 석탄과 장작을 배달하며 생계를 꾸리는 상인 빌 펄롱이 사는 뉴로스 항구 마을입니다. 1980년대 당시 아일랜드 사회는 경제적으로 성장했지만,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는 도덕 규범 아래 “마그달렌 수녀원” 같은 시설이 여전히 존재했죠. 키건은 실제 사건을 노골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침묵 속에 ‘공공연한 비밀’이 떠다니는 공기를 세밀하게 포착합니다. 빌의 하루는 석탄 먼지와 겨울 바람으로 가득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을 살뜰히 보듬어 준 여성들의 기억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따뜻한 온기를 내뿜어요. 이 대비가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정서적 뿌리이자, 독자가 금세 몰입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소녀를 만난 밤, 흔들린 일상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빌은 수도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밤늦게 홀로 남겨진 한 소녀를 발견합니다. 눈길을 스치듯 만난 그 장면이 그의 일상에 균열을 내기 시작해요. “나 하나 움직인다고 달라질 게 있을까?”라는 회의와, “지금 눈앞의 아이를 외면하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라는 두려움 사이에서 빌은 망설입니다. 이야기는 극적 사건보다, 그가 마음의 문턱을 하나씩 넘는 과정을 천천히 따라가며 긴장감을 높입니다. 마을의 침묵, 교회의 권위, 가족 부양이라는 책임이 빌을 붙잡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손길이 닿을 만큼의 변화를 선택합니다.
작은 손길이 여는 변화

이 책은 ‘사소한 것들의 무게’를 묻습니다. 문을 두드리고, 한 끼 식사를 건네고, 진실을 말하는 작은 행동들이 인간 존엄을 지키는 첫걸음이라는 메시지가 선명해요. 반대로 아무도 말하지 않고 묻지 않는 침묵이 어떻게 폭력을 공고히 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빌의 움직임은 거창한 영웅주의가 아니라, “아버지라면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한다”는 평범한 윤리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독자는 책을 덮고도 ‘나였다면?’이라는 질문을 오래 붙들게 됩니다.
코끝에 남은 장면 세 가지
- 수도원 세탁실에서 새어 나오는 강렬한 비누 냄새와 찬 기운,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소녀의 눈빛. 냄새와 온도라는 감각으로 억압을 체감하게 하는 장면입니다.
- 집으로 돌아온 빌이 잠든 다섯 딸을 바라보며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 나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자문하는 대목. 사적 책임과 공적 도덕이 맞닿는 순간이죠.
- 마지막에 빌이 트럭을 몰고 어둠을 가르는 장면. 결과를 명확히 밝히지 않지만, 전조등의 빛만으로도 ‘다음 길’이 열렸음을 암시하며 여백을 남깁니다. 독자가 스스로 윤리적 결론을 채우게 만드는 여운이 강렬합니다.
짧지만 오래 머무는 온기
분량은 얇지만 마음에 오래 남는 무게감이 있습니다. 현실 전체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삶을 조금 덜 고통스럽게 만드는 행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 주죠. 또한 침묵의 공모가 만든 구조적 폭력을 개인이 어떻게 깰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두려움과 해방감을 동시에 마주하는지 보여 줍니다. 겨울밤 따뜻한 담요처럼 짧게 읽히지만, 그 안에 숨어 있는 질문은 쉽게 식지 않습니다. 혼자 조용히 읽고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친구나 가족과 윤리와 연대에 대해 대화 나누기에도 훌륭한 선택이 될 거예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저자 클레어 키건
출판 다산책방
발매 2023.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