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제주4·3 기억을 어루만지는 한강 장편소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의 상처를 오늘의 언어로 더듬어 묻고, 남겨진 자들의 침묵과 애도를 섬세하게 비추는 작품이다.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고통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듯 써 내려가며, “기억하는 행위 자체가 사랑”임을 조용히 일깨운다. 이 책을 펼치면 눈 덮인 산길과 차가운 돌무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대화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게 된다. 역사적 비극을 다루지만 공포보다 따스함이 먼저 다가오는 이유는, 한강이 삶을 이어 가려는 작은 손짓들을 끊임없이 포착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그 손짓을 따라가며 기억과 애도의 윤리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상흔을 바라보는 한강의 시선

한강은 폭력의 흔적과 그 이후를 서정적인 문장으로 포착해 온 작가다. 『소년이 온다』가 광주를, 『흰』이 상실의 공기를 품었다면, 이번 소설은 제주 4‧3을 통해 ‘떠난 이’와 ‘남은 이’ 사이의 긴 끈을 당긴다. 작가는 가해와 피해를 선명히 가르는 대신, “어떻게 살아내는가”라는 질문에 집중한다. 그 결과 독자는 참혹한 역사와 동시에 살아 있으려는 의지, 서로를 붙잡는 온기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한강이 보여주는 눈빛은 차갑지만 그 안에 자리한 연민은 따뜻해, 읽는 내내 서늘함과 위로가 동시에 스민다.
겨울집, 세 사람의 이야기

이야기는 산골 ‘겨울집’으로 시작된다. 전시 작가 경하, 그의 오랜 친구이자 사진작가 인성, 그리고 인성이 돌보는 노모가 눈보라 속에 고립된다. 노모는 4‧3 당시 가족을 잃고도 끝내 “그날”을 입 밖에 내지 못한 인물로, 침묵이 몸에 굳은 세월을 보여 준다. 폭설로 길이 막힌 집 안에서 세 사람은 과거로 이어지는 좁은 문을 조금씩 연다. 밖에서는 나뭇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들리고, 안에서는 눌러 놓았던 기억이 삐걱거리며 깨어난다. 현재 시제 속에 과거의 울음이 겹쳐지면서 독자는 “지금 여기”와 “그때 그곳”을 동시에 겪는다.
말하지 못한 말의 무게
소설의 중심에는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놓여 있다. 침묵은 생존의 전략이었지만, 그 침묵이 남긴 응어리는 세대를 건너며 몸에 새겨졌다. 경하는 노모에게 묻고 싶으면서도 끝내 묻지 못하고, 인성은 사진으로만 기억을 붙잡으려 애쓴다. 기록되지 못한 이름들, 증언되지 못한 광경들은 모두 ‘작별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한강은 이 상태를 끌어안고, 말이 닿지 않는 영역까지 언어를 뻗어 본다. 독자는 말 없는 장면에서 오히려 더 큰 떨림을 느끼며, 기억의 윤리와 책임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
눈 속에서 만난 문장들
눈 덮인 숲을 걷다 돌무덤 앞에서 멈춰 서는 장면이 특히 강렬하다. 차가운 돌 사이로 스민 검은 흙은 살해된 이들의 이름 없는 무덤을 상징한다. 경하가 “우리가 이렇게라도 봐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속삭이는 대목에서, 바라봄이 곧 애도라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또 “손을 내밀면, 사라진 자들의 체온이 아직 남아 있다”라는 문장은 시간의 거리를 넘어서는 감각을 만들어, 읽는 이의 가슴에 오래 남는다. 한강은 폭력의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여백과 정적을 통해 더 큰 잔향을 남기는 방식을 택한다. 그래서 독자는 단 한 줄의 문장에서도 긴 시간 울리는 메아리를 듣게 된다.
차갑고 따뜻한 문체의 결

한강 특유의 절제된 문장은 이번에도 빛을 발한다. 문장 하나하나가 얼음처럼 투명하지만, 그 아래에는 뜨거운 혈류가 흐른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구성, 짧은 단락과 여백이 반복되는 리듬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둘러싼 숨결을 만든다. 사진, 그림, 눈, 돌 같은 사물이 서사에 자주 등장해 감각적 무게를 더하고, 독자는 촉각과 시각을 함께 사용해 이야기를 읽게 된다. 이처럼 차가움과 온기가 교차하는 문체 덕분에, 소설은 비극을 다루면서도 끝내 인간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는다.
오래 남는 잔향
책을 덮고 나면 오래도록 눈발이 흩날리는 느낌이 남는다. 소설은 거대한 역사적 참사를 정면으로 재현하기보다, 그 여진이 개인의 일상과 몸에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보여준다. 덕분에 독자는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서 4‧3을 마주하게 된다. 슬픔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잡는 장면들은, 현재를 사는 우리가 무엇으로 연결되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한강은 애도의 감정을 정적 속에서 길어 올리며, 독자가 스스로 기억의 자리를 마련하도록 도와준다.
기억을 잇는 숨길
『작별하지 않는다』는 완전한 작별이 아니라 기억을 잇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한강은 이 소설을 통해 “끝내 이야기되지 못한 것”에 작은 숨길을 열어 준다. 그 숨길을 따라 걷는 일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언어로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행위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일과 같다. 겨울집의 촛불처럼, 그 말은 오랜 시간 꺼지지 않고 타오르며 우리에게 기억의 책임과 연대의 가능성을 동시에 건네준다.
작별하지 않는다
저자 한강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1.09.09